최병헌은 조상이 전해준 오래된 종교와 지난 3년간 선교사가 전해준 새로운 종교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유교로부터 개종했다는 분명한 표시로 조상의 위패를 불살랐다. 최병헌이 입교하기로 결심하자동료 양반들은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최병헌이 세례 받기로 한 일요일 아침에 그의 친구 몇 명이 최병헌의 집에 가서 그의 겉옷, 갓, 신발을 몰래 가져간 다음, 문지기를 세워 하루 종일 그의 의관을 지키게 했다. 다음날 최병헌은 존스를 찾아가 자기가 전날 나오니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두 사람은 공개적인 발표 없이 세례식을 수요 기되회 때 거행하기로 약속했다. 결국 최병헌은 1893년 2월 8일 수요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며칠 동안 양반 친구들과 친지들을 찾아다녔다. 최병헌은 자신이 기독교인이 됐다는 사실이 친구나 친지들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그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을 주었다. 세례식은 그와 친구들 사이에 놓여 있던 다리를 없앴다. 최병헌이 존스에게 한 말을 빌리면, 그는 '조상을 버린자'였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친구도'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씨는 1893년 서울의 장로교회에서 '어느 누구보다 지위가 높은 자'였다. 그는 31세로 정6품 무관 벼슬을 지낸 자였다. 신자가 된 지 얼마 후 한 씨는 무어 목사와 함께 기독교 서적을 팔면서 서울 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씨가 소책자를 읽으며 '우상과 귀신 숭배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청중이 그에게 돌을 던졌다. 또 어느 날은 사람들이 책을 파는 양반이 아니라 상놈이라고 생각하고 때렸다. 하지만 한씨는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런 박해를 견뎠다. 당시 양반은 상놈이라면 누구든 잡아다가 매질할 권리가 있었다. 상놈은 양반에게 말할 때 깍듯이 존대해야 했다. 상놈이 양반을 때리거나, 양반이 노동을 하거나, 상놈에게 존대어를 사용하는 일은 한국에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1893년부터 한국에서 새로운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반이 거리에서 전도하며 책을 파는 일을 하고, 일반 평민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옥성득, <한국기독교 형성사> P. 534~535
한국 교회의 초기 양반의 박해의 모습이다. 이것은 중동지역의 이슬람 개종자에게서 들려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나라 한국에서 였다. 이렇게 박해와 고난속에서 신앙을 지켜 온 우리의 증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