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m/1322?category=820383
6장은 초기 한국 개신교가 거의 모든 문서와 서적을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지적하고 그 영향을 분석했다. 고품질의 한문 서적과 소책자들은 한국에서 바로 사용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 비슷한 한국에서 중국 문화와 종교에 적응된 그 문서들은 매우 효과적인 전도 도구요 신학교재였다. 따라서 재한 선교사들은 스스로 전도 문서를 저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한문 전도 소책자와 그 한글 번역본은 한국인들에게는 기독교 입문서였지만, 젊은 재한 선교사들에게는 한국어와 동아시아 문화와 종교를 배우는 교재였다. 중국의 소책자와 서적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젊은 선교사들은 한국 종교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레그(James Legge), 마틴(William A. P. Martin), 파베르(Ernst Faber), 로스(John Ross)와 같은 중국의 진보적 복음주의 선교사 학자들이 재한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보수적인 선교사 작가인 존(Griffith John)도 유학자 계층을 위해서 쓴 후기의 책에서 온건한 성취론을 채용했는데, 초기 한국 선교는 그의 소책자를 널리 사용했다. 마틴의 "천도소원"(1854)은 유학 경전을 읽고 성장한 교육 받은 한국인 기독교인 계층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한문 서적의 하나였다. 한문으로 된 성경, 전도 소책자, 찬송가, 변증서, 비교종교서, 신학서 등이 한글로 번역되거나 한문 그대로 사용됨으로써 한국 선교는 단시간에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나, 자기 신학을 위한 저술과 신학적 작업은 상대적으로 무시됨으로써 질적 성숙에는 장애가 발생했다.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한국 개신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다른 중요한 중국 기독교 문서는 중국선교백주년기념성경주석서, 한문 설교집, 예식서 등이었다. 이런 문서들을 통해 초기 한국 개신교는 중국 개신교의 용어와 신한 개념을 수용했는데, 한국 개신교와 중국 개신교 간의 언어-신학적 연속성은, 초기 근대 한국에서 일본의 과학(특히 의학)과 일반 학문 용어를 수용함으로써 발생한 한일 간의 언어-이론적 연속성과는 완전히 상이한 현상이었다. 이 차이는 일본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의 형성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이 신학의 주류(主流)는 영미 복음주의였으며 진보적인 개신교 복음주의가 해방 이전까지 강력한 저류(底流)로 흐르면서, 1910년 이후 등장한 신류(新流)인 자유주의 일본 신학과 대결했다.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P. 700~701
보통 한국 기독교 전래는 영미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영미중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한문을 주로 읽었던 우리나라 옛적에 어떤 책이 읽혔고 어떤 선교사들이 활동을 했는지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미중을 통해 우리나라의 신앙이 들어왔으며 그것은 이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기라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