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새 종교를 영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바울의 설교에는 이방인을 향한 회유와 공감의 자세가 있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한 난폭한 공격도 거칠고 포악한 행동도 없었고, 그들의 잘못에 대한 조롱이나 경박한 비웃음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우상 숭배의 죄를 눈감아 주지도 않았고, 거짓 종교를 최대한 이용하려고 노심초사하지도 않았으며, 어느 종교든지 올바로 이해만 하면 모두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그분께 이를 수 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시사하지도 않았다. 사도 바울은 청중들을 향해 그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을 명약관화하게 밝혔다. 그들 앞에 놓인 그 소망을 누리려면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태세를 갖추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는 쉬운 길은 없다고 양쪽 세계에서 모두 잘 될 방법은 없으며,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구원의 길이 없고, 핍박을 각오하지 않고는 교회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오늘날은 이처럼 엄격한 교리를 피하는 분위기다. 오히려 이방 종교의 진리와 미덕을 과장하고픈 유혹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갈라 놓는 간격을 최소화하고 싶어 한다. 또 감히 우상 숭배를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꺼린다. 심판관이 문 앞에 찾아왔고, 하나님의 진노가 온갖 불경건함을 겨냥하여 곧 나타난다는 위기의식도 잃어버렸다. 우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더 이상 '닥쳐 올 진노로부터의 구출'로 여기지도 않는다. 교회의 임무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선민을 불러 모아 그분의 아들과의 교제로 이끄는 것이라기보다, 세상을 기독교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사람들이 성도의 구원보다는 인류의 구원에 관해 모호하게 얘기하는 소리를 듣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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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새로 개척한 교회에 네 가지를 남긴 것 같다. 간단한 복음의 가르침, 두 가지 성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에 관한 전통, 구약 성경 등. 그가 주기도문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성례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어떤 예배 형식이나 기도의 형식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 글로 쓰인 복음이나 공식 신조가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 모두 합쳐도, 우리가 보기에 놀랄 정도로 적은 것 같다. 교회가 그처럼 작은 토대 위에 세워 질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이처럼 단순하고 짧은 가르침이 오히려 교회의 힘이 될 수 있었다. 사실 외국의 완벽한 예배와 신학 체계를 모두 수입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다. 우리는 공식 예배를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또 우리의 기도서가 매년 순환적으로 믿음의 체계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기도서를 수입해서 새로운 교회에 전수한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완벽하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초심자들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단지 그 전체 주기를 한 바퀴 돌도록 강요될 뿐이다. 덧셈을 배우기도 전에 나누기를 공부해야 하고, 나누기를 섭렵하기도 전에 분수와 소수를 접해야 하는 등, 이런 식으로 계속 돌아가다 보니 결국 그들은 진리를 통달하겠다는 노력마저 그만두고 만다. 반면에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다수에게 가장 단순한 요소들을 가장 단순한 형식에 담아 가르치고, 더 많은 지식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몇 가지 기본 진리에 대해 묵상하고 발견한 바를 서로에게 가르치도록 그들을 내버려두는 등 여러 방식으로 그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섭렵하게 해주었다. 교리문답 선생과 기도서를 합쳐도 오랜 묵상과 개인적 공부, 공동의 탐구와 가장 단순하고 필수적인 진리의 반복 학습 등을 대치할 수 없다. 우리는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다. 기독교의 한 가지 교리에 대한 단순한 설교를 듣고 복음서나 교리 문답집과 같은 간단한 책을 들고 집에 돌아간 어떤 사람이, 상당한 지식과 열정을 품은 것을 보고 깜작 놀라는 경험. 그리고 이삼 년 혹은 수년 후에 돌아와서는 번뜩이는 영적 통찰력을 발휘하는 모습에 더더욱 놀라는 경험. 그는 그 한 가지 진리를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했고, 그것이 그의 세계 전체를 조명해 주는 것이다. 반면에 기도서를 먹은 그리스도인들이 싱앙에 관한 전반적 지식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웠으나, 갈 길을 비춰 줄 빛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신조는 아주 간략하지만, 얼마든지 아주 길고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그리스도를 붙잡는 데 그리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단순하고 간단하게 시작했다.
P. 146~148
롤런드 앨런 | 홍병률 옮김 | 전재옥 해설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바울의 사역을 분석해주는 책은 귀하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진리들을 정리해주고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준다. 내가 배워야 할 것들 행해야 할 것들을 잘 분별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