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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미화되었던 토마스 선교사의 찐 순교역사

A photograph of Robert Jermain Thomas

 

토마스는 실망에 빠졌지만 곧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시장 개척을 위해 조선으로 가는 미국인 소유의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으로 동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윌리엄슨이 전도용 책자를 공급했다.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8월 즈푸를 떠나 백령도에 도착한 후 다시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향했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는 박규수(1807~1877)였다. <열하일기>를 쓴 진보적 유학자 박지원(1737~1805)의 손자로서 그는 할아버지의 학문적 전통에 따라 실용적 학문과 주체적 개항을 추구했고, 이후 김옥균(1851~1894), 박영효(1861~1939) 같은 개화파 인물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조선 영토에 진입한 이양선을 환영할 수는 없었다. 박규수는 관리를 보내 국법으로 교역이 금지되어 있으니 물러가라고 정중히 요구했다. 그런데 총과 칼ㄹ을 찬 채 우두머리처럼 행동하던 통역 토마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월내 군함이던 제너럴셔먼호는 중무장 되어 있었고, 선원들은 포와 총을 쏘며 약탈과 납치, 살상을 자행했다. 한국인들은 격분했다. 박규수는 마침 강의 수위가 낮아져 배가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자 두 차례의 화공을 실시하여 배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토마스를 비롯하여 선원들이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리자 조선 군인과 백성들이 그들을 모두 붙잡아 죽였다. 

  사건 직후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는 "살려 달라 간청"하다가 결박되어 강가로 끌려갔고, 분노한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칼로 찌르고 때려 죽였다.(고종실록 각주) 그가 자신을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서를 전하고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사건 발생 후 60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등장한 후 점점 더 첨가되고 미화된 형태로 퍼졌다. 

 

_류대영,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 초판 2023, 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