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 년 뒤에 태어난 독일 작곡가 바흐는 묘할 정도로 루터와 공통점이 많았다.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는 아이제나흐는 바흐의 고향이다. 바흐는 1521년 루터가 설교했던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루터가 다녔던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둘의 인연은 아이제나흐로만 그치지 않는다.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루터는 로마 카톨릭을 대변하는 동료 요한 잉골슈타트대 교수와 면벌부 판매의 정당성과 교황의 권위 등을 주제로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당시 루터를 지지하는 대학생 200여 명이 도끼와 창으로 무장하고 루터가 탄 마차와 숙소 주변을 지켰다. 대부분의 논쟁이 그렇듯 훗날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도 승부는 명확하게 판가름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 의의는 다른데 있었다. 훗날 신교와 구교로 갈라지는 양측의 입장 차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루터가 목숨 걸고 논쟁에 뛰어들었던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172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봉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루터는 이렇듯 바흐의 삶과 죽음에 모두 연관되어 있다. 루터의 신조는 다섯 개의 '오직'으로 표현된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a Scriptura, Sola Fide, Sloa Gratia, Slous Christus, Soli Deo Gloria" 이다. 바흐는 마지막 구절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약자인 SDG를 작곡을 끝낸 악보 말미에 기입했다. 바흐의 종교곡은 루터 신앙의 음악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핵심에 해당하는 장르가 칸타타와 수난곡이었다. 영국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바흐에게 미쳤던 영향은 지대했다. 바흐의 세계관을 형성했고, 장인이자 음악가라는 직업관을 강화했으며,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도록 했다. 그 영향력은 텔레만, 마태존과 헨델 등 다른 동시대 독일 음악가보다 훨씬 더 깊었다."
김성현 <바이블 클래식> 232~ 233p. / 1판 1쇄, 2020.09.11 / 생각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