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교육 신학자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천년왕국을 소망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이러한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은 코메니우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많은 경건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서도 고대했던 종말론적인 신앙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천년왕국은 평화의 왕국으로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그리스도의 통치를 뜻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약속한 땅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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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인류 구원 교육과 세계개혁과 천녀왕국의 종말론적인 신앙에 관한 이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그 당대의 신학자들에게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자 마레시우스의 비판은 코메니우스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사건으로 역사는 전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죽기 1년 전의 일로서 건강의 악화로 아무런 대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의 역사적 배경은 루터주의나 칼빈주의적인 그 당시 정통주의자들의 종말론 이해가 얼마나 종교개혁자들(루터와 칼빈)의 전통에 서 있었는가를 보여준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들은 땅에서 이루어질 천년왕국에 대한 관심은 아예 전무하였고, 오히려 어거스틴적인 종말론에 더 충실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에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천년왕국 사상은 종교개혁전통보다는 경건주의자들에 의하여 더 강하게 제기되었으며, 코메니우스는 그러한 생각의 전주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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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코메니우스 이래로 천년왕국의 신학적인 이해는 19~20세기에 이르러 세대주의적 천년기설, 역사적인 전쳔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 등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코메니우스의 천년기설을 내재적 낙원과 초월적 낙원의 관계에서 오히려 내재적 낙원 이해의 관심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한 전 인류의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관리와 보전의 사역과 맞물린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복음전파를 통한 죄인의 구원사역과 함께 병행되어야 하는 양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도 여전히 요구되는 시각이 분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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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코메니우스의 종말론, 특히 천년왕국의 기대는 이러한 이원론적인 신앙태도를 극복하는 일에 큰 도전이 분명하며, 그간 한국교회의 협의적인 종말 신앙의 이원성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라고 본다. 그리고 세상의 인간적인 일들(의와 평화실현)에 대하여 더욱 능동적이며, 책임있는 신앙이 되도록 하는 일에도 큰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
정일웅, <교육신학자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p. 157~161, 범지출판사
"이로서 17세기에 천년왕국을 성경의 문자 그대로 믿는 신학자가 한 명 더 늘어난 듯하다. 찰스 라이리에 의하면 17세기의 시대를 구분했던 신학자는 피에르 포와르, 존 에드워드, 아이작 왓츠가 경륜을 나누었던 인물로 제시 했지만 코메니우스도 추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에라스무스, 루터로 시작된 성경번역과 멜랑히톤, 칼빈의 신학정립과 성경을 시대별로 구분하는 방법론도 본격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